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스타프 말러 (문단 편집) === 결혼 이후 === 1902년, 말러는 19살 연하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했다. 흔히 사람들 사이에 말러의 에피소드로 회자되는, 오케스트라 연습중 1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 말러에게 단원들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묻자 '결혼하고 왔다'고 말하는 에피소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지 버나드 쇼]]도 어쩌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진위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말러는 본인이 의도치 않게도 [[NTR]]을 행하게 되었다. 본래 알마는 말러의 지인이자 알마 본인의 음악 선생이었던 [[알렉산더 쳄린스키]]와 연인 관계였다. 하지만 알마의 가족들은 쳄린스키가 못생기고 명성이 낮다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알마와 쳄린스키는 헤어졌다. 그 직후에 말러와 알마가 결혼해 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서 '푸치'라는 애칭의 마리아 안나와 '구키'라는 애칭의 안나 유스티네[* 언니와는 달리 안나 유스티네는 오래 살아서 1988년까지 생존했고 조각가로 활동했으며, 그녀의 딸인 마리나 말러(Marina Mahler)는 말러 재단(mahler foundation)을 설립하여 현재 말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를 낳았다. 빈 시절은 말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말러는 마이에르니히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철에 작곡에 열중해 교향곡 제4번, 5번, 6번 "비극적", 7번, 8번 "천인의 교향곡"과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가곡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뤼케르트 가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1907년, 산산히 깨지게 된다. 그해 말러는 장녀인 마리아 안나를 [[성홍열]]로 떠났보냈으며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에다가 말러 자신도 심장에 병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걸음걸이 수까지 세면서 걸을 정도로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말러의 비타협적 성격과 완벽주의에 반감을 품고있던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19세기말 유럽을 강타한 반유대주의[* 1897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과 1905년에 러시아에서 공개된 시온 의정서 파문으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에 발맞춰 언론들도 말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가했고, 그는 그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후 말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한 시즌동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그러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더 선호하던 메트 이사진들의 선호도에 밀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제안으로 뉴욕 필의 지휘자가 된다. 이후 말러는 죽을 때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시기 말러는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인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 마음 편할 날 없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그리고 결국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10번이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정서, 알마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뒤엉켜 있다. 말러가 교향곡 9번격에 해당하는 "대지의 노래"에 9번의 번호를 붙이지 않은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의 영향으로 보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후 클래식 작곡가의 유명한 징크스 중에 9번 교향곡을 쓰면 쓰다가 죽거나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것이 있다. 이 저주를 겪지 않은 작곡가 중 하나가 20세기에 15개의 교향곡을 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가 있다. 말러는 이 징크스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9번 교향곡이 되었어야 할 곡을 대지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여서 피해갔으나, 방심했는지 10번째로 교향곡을 하나 더 썼는데 이게 9번 교향곡이 되면서 이 징크스의 새로운 희생양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9번 교향곡의 저주]] 항목 참조.] 결국 스스로도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듯, 말러는 1910년,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심리면담을 받게 된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잠재기억을 이끌어내 말러의 우울증이 어린시절 형제들의 죽음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학대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끌어냈고, 부인 알마에 대한 집착은 알마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하려고 한 탓이라 진단했다. 말러 본인은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한다는 진단은 부정했다. 1911년 2월, 말러는 뉴욕에서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심내막염]]이 걸려 발열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마친 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당시 새로운 백신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쇄상구균 감염의 경우 백신은 치료 효과가 없으며, 항생제 발명 이전 시대였기에 심장병을 가진 말러에게 생긴 심내막염은 치명적이었다.]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말러 자신의 요청으로 빈으로 옮겨진 후 1911년 5월 18일, 아내 알마가 임종을 지킨 가운데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세상을 떠난 딸의 묘가 있는 빈 근교 그린칭 공동묘지에 딸 옆에 안장되었다. 말러는 생전에는 뛰어난 지휘자로만 주목받았고, 그의 교향곡들은 제2번 "부활"과, 제3번, 8번 "천인" 정도가 연주에서 호평을 받은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이자 친구들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정도 외에는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지휘자도 별로 없었고 나치 독일의 억압 하에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한 탄압에 의해 거의 묻히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960년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은 다시 주목을 받아 활발하게 연주되었고 오늘날, 세기말의 정서를 그려낸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여담으로, 말러 본인의 명언 중에 '나의 시대는 올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되었다. 오늘날 말러의 인기는 대단해서 말러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레리안]]이라는 용어까지 생겼을 정도. 현대 영화음악의 발전에 있어서도 말러 특유의 초섬세부터 초거대 다이나믹의 스케일과 드라마틱한 서사성, 풍부한 감정표현으로 에리히 코른골드부터 엔리오 모리코네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끼친 지대한 영향 역시 결코 부정할 수 없다.[* 007 시리즈, 아웃 오브 아프리카, 늑대와 춤을 등의 사운드트랙들로 유명한 아카데미 수상 영화음악가 존 베리는 롱 아일랜드의 자택 풀장에서 말년까지 말러의 교향곡을 거대 오디오 스피커 시스템에 틀어놓고 수영을 하곤 했다고. [[https://www.classicfm.com/composers/barry/guides/reasons-love-barry/|#]]] 또한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비롯한 말러의 곡들이 수 많은 영화나 TV 드라마 등에 테마 음악으로도 쓰였다.[[https://www.wqxr.org/story/where-have-i-heard-mahlers-music-screen/|#]] ||[youtube(EmzOgiy8cBQ, width=480, height=240)] || 말러 사후 아내 알마는 1915년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와 재혼했으나 5년만에 이혼했고 1929년 시인이자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1890~1945)과 재혼했다. 베르펠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말러를 추앙했던 번스타인등과 교류하며 살다가 1964년 85세에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